산청소개

지명의 역사적 내력

지명의 역사적 내역(來歷)

지금의 산청군은 산음과 단성을 통합한 군으로, 옛날 삼한시대에 변한(弁韓)땅이었고 가야국(伽倻國)으로 선사시대를 겪으면서 신라에 통합되었다. 이후로 고려, 조선, 일제강점, 독립대한으로 이르면서 인접 군현과 이합변동(離合變動)이 심했다. 군내 각처에서 선돌, 고인돌 등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므로 청동기시대에는 이 지방의 전 지역에 사람들이 널리 펴져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강누리에서는 최근 빗살무늬 토기의 포함층이 확인되어 일찍이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사람들이 남강을 따라 이곳 산청으로 올라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에는 생초면 어서리와 신안면 중촌리 고분군의 규모와 부장품의 내용으로 보아 5, 6세기경 가야계열의 부족국가가 이 지방에 분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선사시대

선사시대라 함은 역사기록이 없었던 시대 즉 역사시대가 되지 못한 시대를 말한다. 즉 문헌이 없었던 시대다. 그러므로 선사시대는 몇 천년이나 아니면 몇 만년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역사 학자들은 지난날의 유적과 유물을 찾아 시대를 추정한다. 우리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언제부터 살기 시작했을까? 하는 문제가 떠오른다. 인류의 문명 발달상을 고고학적 탐구성과에서 밝히려 하고 있다.

우리 지역에서도 경호강유역을 따라 퇴적평지(堆積平地)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여건에서 추리된다. 강누에서 발굴된 빗살무늬 무문토기(無紋土器)와 생초 어서리(於西里)와 신안 중촌의 고분군(古墳群)그리고 산재되어 있는 지석묘(支石墓)등으로 미루어 보면 삼한시대는 널리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 기록은 신라초반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점은 불교문화의 유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신라시대

신라 35代 경덕왕 16년(757년) 궐지군(闕支郡)을 궐성군(闕城郡)으로, 지품천현(知品川縣)을 산음현으로, 적촌현(赤村縣)을 단읍현으로 개칭하여 산음·단읍 2현을 궐성군 소속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한편 지리산을 오악(五嶽)의 하나로 숭앙(崧仰)하였으며 신라말 선종이 성행하면서 단속사(斷俗寺), 삼장사(三壯寺) 등 크고 작은 사원이 이 지방에 건립되어 불교의 큰 중심지를 이루었다.

  • 산음현 : 처음에는 지품천현인데 35代 경덕왕(764년)때 산음현이라 고쳐 궐성현에 영속시켰다.
  • 궐성군(단성) : 궐지부이었는데 경덕왕이 궐성군이라 고치고 산음과 단읍을 영입하였다.(757 ∼ 1018의 261년간)
  • 단읍(적촌)현 : 적촌현을 단읍으로 고쳐 궐성군에 영속했다.

고려시대

고려초 궐성군은 한때 강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강성군으로 되었으며, 단읍현을 단계현으로 개칭 하였다. 현종 9년(1018년) 산음·단계 2현을 합천에, 강성군은 진주목에 귀속되었다가 공양왕 2년(1390년) 단계는 강성군의 영현으로 복귀하고, 산음·강성에 감무를 두었다. 공민왕 16년(1367년)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면화 종자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과 협력하여 단성면 사월리에서 재배와 방적(紡績)에 성공하여 국민생활과 국가경제에 크게 공헌하였다.

  • 산음현(산청) : 현종 9년(1018年)에 합천군에 영속되었으며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산음현으로 감무(監務)를 두었다.
  • 강성현(단성) : 궐성군을 강성현으로 고치고 현종왕때 강주에 영속되었으며, 공양왕 때 단읍을 영속받아 강성현으로 감무를 두었다.
  • 단읍(단계) : 현종 때 단계라 고치고 합천에 영속되었으며 공양王 때 다시 돌아와 강성현에 영속되었다.

조선시대

정종 1年(1939년) 거제도의 명진현이 왜구를 피하여 강성현으로 옮겨 오면서 두 현을 合하여 진성현으로 개칭하였다. 태종 13年(1413년) 산음현의 합주 소속이 해제되면서 현을 지금의 산청읍으로 옮기고 현감을 두었다. 세종 14년(1432년) 명진현이 거제도로 수복되면서 강성현과 단계현을 합하여 단성현으로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 산음현의 호구수는 257戶, 1,138인이고 진성현은 234호, 872인이며 단계현은 139호, 496인이었다. 선조 32년(1599년) 단성현을 폐하고 산음현으로 편입하였다가 광해군 5년 (1613년) 단성현을 복구(復舊)하였다. 영조 43년(1767년) 산음현을 산청현으로 개칭하였다. 영조 47년(1771년) 산청현의 호구수는 2,114호, 8,989인이며 단성현의 호구수는 2,526호, 9,994인이었다.

  • 산음현 : 선조 32년(1599년) 단성현이 임란에 황폐되어 산음현에 영속되었다가 15년 후 광해군 때 단성현이 독립되었다. 영조43년(1767년 )산음현에서 7세 여아(女兒) 사건(事件)으로 산음을 산청으로 현명을 바꾸었다. 고종 33년(1896년)에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관할면으로 현내, 월동, 지곡, 수곡, 차현, 황산, 오곡, 부곡, 생림, 초곡, 고읍, 모호, 서상, 서하, 금석 등의 15개 면이다. 한말 1906년 칙령으로 진주땅인 삼장, 시천, 금만, 오곡, 파지, 사월의 6개 면을 두입(斗入)받았다. 그리하여 산청군은 21개 면이 되었다.
  • 단성현 : 정종(1398년) 때에 임란으로 영선의 명진현 사람들이 와서 세종(1450년) 때에 명진으로 돌아갔다. 고종 33년(1896년)에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관할면은 현내, 원당, 북동, 오동, 생비량, 도산, 신등, 법물 등의 8개 면이다. 왜 1906년에 진주령 6개 면을 인접된 단성군에 두입하지 않고 산청군에 비입한 이유는?
    당시 산청군은 15개 면세였고 단성군은 8개 면세였는데 왜 적은 단성군을 그대로 두고 산청군을 21개 면으로 불균형을 취했을까?
    이들 6개 면이 관아에 갈려면 단성은 10∼20리 거리고 산청은 60∼70리의 거리를 두고 있는데 왜 그랬을까?
    그때부터 장차 합군의 계략이 있었다해도 단성군에 편입했다가 합군하면 되는데 그 까닭은?
    그 이유는 이렇게 구전되어 왔다.
    단성을 일제가 거북한 상대로 알고 있었다. 옛날부터 단성은 진주와 같이 사족(士族)들이 남명사상에 젖어 경의주일(敬義主一)로 삼고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위선(僞善) 매(罵)하는 선비풍이 남다르고 배일사상(排日思想)이 투철하기 때문에 억세제재(抑勢制裁)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라고 전하여 온다.

일제강점시대

고종 32년(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산청현과 단성현이 군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 행정구역 정비에 따라 진주군의 삼장, 시천등 6개 면이 산청군에 편입되고 1914년 단성군이 산청군으로 통합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지방 출신 한말의 거유 곽종석은 거창에 은거하다가 문인 김황과 더불어 전국의 유림을 동원하여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를 내는 등 유림의 구국운동을 주도하였다. 산청군은 1914년 행정구역 개폐로 단성군과 합군되었다. 진주령인 대평면 대평리 일부와 대각면 자매동 일부와 조산면 묵곡리가 편입되었고, 삼가군 신지면, 소야리 일부와 아곡면 제보리 일부를 병합 하여 11개 면으로 개편되었는데 그 내용은 산청, 차황, 오부, 생초, 금서, 삼장, 시천, 단성, 신안, 생비량, 신등이다.

대한민국

1948年 여순 반란사건과 1950년 6·25동란 때 지리산으로 도피한 공비의 잔당이 살인, 방화등의 만행을 자행하여 군민들에게 쓰라린 상처를 주었다. 1967년 지리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 산청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에 하동군 옥종면 중태리를 시천면으로 편입하여 284개 리로 총면적 793.62㎢이다.

산청군 지명유래 - 구분, 역사적 내역 순으로 정보 제공
구분 역사적 내역
산청읍 산청군의 소재지 읍으로서 옛적에는 현내, 월동, 지수, 지곡이였는데, 1906년 군월, 지수면으로 되었다가 1914年 3月 1日 행정구역 개편 때 군내면과 월동면을 그리고 차현면의 송경동을 편입하여 15개 동을 6개리로 병합하여 군월면으로 하고 지수면과 수곡면을 합하여 21개 동을 8개리로 병합하여 지수면으로 하였다가 1917년 6월 면제공포시 군월면과 지수면을 통합하여 총면적 68.73㎢으로 산청면이 되었는데 1979년 5월 1일에 읍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차황면 차현면과 황산면을 그리고 삼가군 신지면 소야동 일부를 통합하여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25개 동을 9개 리로 병합하여 두 면의 글자를 따서 차황면이라 하고 소재를 신기리에 두었다가 1931년 7월에 장위리로 옮겼으며 1973년 7월 1일 신등면의 상법·철수 2개 리가 본 면에 편입되어 11개 리가 되어 면적이 48.73㎢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부면 오곡면과 부곡면을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24개 동을 8개 리로 병합하여 두 면의 글자를 따서 오부면으로 하고 면적 35.07㎢로서 내곡리에 소재를 두었다가 1942년에 양촌리로 옮겨 오늘에 이르렀다.
생초면 옛 산음현의 소재지였던 고읍면과 생림면 초곡면 모음면으로 나뉘어 있던 것을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시 42개 동을 12개 리로 병합하여 생초면으로 하고 그 면적 53.10㎢로서 면의 소재지를 어서리에 두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서면 금석(琴石)면과 서상면 그리고 서하면으로 되어 오다가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3개 면 27개 동을 12개 리로 통합하여 금석의 “금”자와 서상서하의 “서”자를 따서 금서면으로 개칭하였고 면적은 76.33㎢으로 소재지를 매촌에 두었다가 1940년에 특리로 옮겼는데 6·25 사변으로 소실되어 1957년 3월 5일에 다시 매촌으로 옮겨 세웠다. 1975년 1월 1일에 서하출장소가 설치되어 옛 서상 서하를 관할케 하였다가 1999년 1월 19일자로 서하출장소가 폐소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삼장면 조선시대에 진주군 서면에 속하였을 때에 삼장사의 이름을 따서 삼장리라 하였는데 구한국시대(1864)에 상(上)삼장면과 하(下)삼장면으로 나뉘어 졌다가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6호로 삼장면으로 통합하고 산청군에 편입되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시 16개 동을 8개 리로 병합하였고 그 면적은 103.24㎢로서 면의 소재를 대포리에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천면 원래 이 곳은 살천(薩川)이라고 하여 조선시대 진주군에 속하였다가 리가 면으로 될 때 소재지를 신천에 두고 신천면으로 되었다가 시천면으로 개칭되고 서기 1906년 3월 1일에 산청군으로 편입되면서 시천면으로 하여 사리(絲里)에 면소재지를 두고 있으며 1983년 2월 15일 하동군 옥종면 중태리가 시천면에 편입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단성면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9호의 지방구역정리건으로 진주군에서 산청현에 편입한 파지산, 백곡, 금만, 사월 4개 면과 원래의 읍내 원당 오동일부 3개 면을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진주의 오산면 묵곡동과 대평면 대평리 일부와 대각면 자매리 일부를 편입하여 43개 동을 17개리로 병합하여 단성면으로 하고 그 면적이 108.31㎢으로서 소재를 성내에 두었다.1962년 6월 5일 서부출장소를 설치하여 옛 금만 백곡과 사월 일부를 관할케 하였다가, 1999년 1월 19일 서부출장소를 폐소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안면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시에는 단성군 청현리에 있던 오동면 일부와 안봉리에 소재한 도산면의 14개 동을 7개 리로 병합하여 도산면으로 신안리에 위치한 북동면의 10개 동을 5개 리로 하여 그대로 북동면으로 각각 개칭하였다가 1917년 6월에 도산면과 북동면을 통합하여 신안정사가 있었던 곳이므로 이름을 신안면이라 하여 소재를 하정리에 두고 면적은 72.52㎢으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생비량면 옛 단성군의 생비량면과 도산면의 일부를 그리고 삼가면 아곡면 제보동 일부를 통합하여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따라 14개 동을 5개 리로 병합하여 생비량면으로 하고 면적 44.06㎢로서 그 소재를 가계리에 두었다가 1944년 10월 1일 도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등면 적화촌현(단주현의 설이 있음) 단읍현이었으나 단성현으로 편입되어 오다가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시 신등면과 법물면을 합하여 30개 동을 13개 리로 병합, 신등면으로 하였고 그 후 1973년 7월 1일에 상법, 철수 2개리가 차황면으로 분리 11개 리 57.01㎢의 면적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