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이야기

남사예담촌

남사예담촌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
남사예담촌 Sancheong Story

흙돌담길 따라 만나는 한옥마을

흙돌담길에 기와 한옥이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남사예담촌은 선비의 기풍이 남아 있는 옛 마을이다. 선비의 상징인 회화나무가 골목을 빛내고 700년 된 매화나무와 600년된 감나무가 꽃피우고 열매 맺는 이 마을은 푸근하고 넉넉한 고향의 품 같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길에 들러 유숙한 이 마을을 걸어보며 숨은 역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남사예담촌 체험 프로그램
  • 전통문화체험 : 한복입기체험, 전통혼례체험, 전통놀이(투호 등) 체험, 천연염색체험, 한방족욕체험, 고가 탐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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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1

흙돌담길 따라 걸으며 만나는 한옥마을

고요히 흘러가는 남사예담촌의 하루는 바쁜 일상에 지친 마음을 치유한다. 고즈넉한 돌담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 옛 모습 그대로인 한옥들이 반긴다. 대다수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이 고가들은 재미있는 사연과 일화들을 품고 있다.

하씨 고가에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있다. 감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넘는데, 문효공 하연이 7세 때 어머니에게 홍시를 드리고 싶은 마음에 손수 심은 나무가 대대손손 보존되어 온 것이라고 한다. 원정공 하즙이 소년 시절 심었다는 원정매는 700년의 세월을 버티다 잠들었지만 같은 자리에 후계목이 자라나 여전히 고아한 매화의 자태와 향기를 전한다.

이씨고가로 가는 길에 있는 신비로운 회화나무는 부부 회화나무라는 별명이 있다. 서로를 향해 팔을 뻗어 끌어안은 형상의 이 나무 밑을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지나가면 백년해로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가는 명소이기도 하다.

고려 충신 정몽주의 후손이 지은 사양정사, 태조 이성계의 사위이자 개국공신이었던 이제에게 내려진 이제개국공신교서를 모신 영모재, 아버지를 향한 화적들의 칼날을 몸으로 막아낸 효자 이윤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한 사효재 등 이 밖에도 많은 이야기가 마을 곳곳에 숨어있다. 옛 이야기들을 따라 마을을 여행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 Story 2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남사예담촌은 이순신 장군의 행적을 담고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인해 한양으로 압송되어 죽을 위기에 놓였다. 이때 영의정 류성용과 판중추부사 정탁 등의 진언으로 사형의 위기를 넘기어 1597년 4월 1일 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왕의 명은 ‘백의종군’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계급 없는 군인으로 강등된 이순신은 같은 해 4월 3일 한양을 출발하여 6월 2일 초계에 도착했다.

난중일기에 이때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장군의 행로가 나와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6월 1일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서 출발하여 오후 늦게 산청의 단성면 사월리 박효원 종의 집에서 유숙했다. 종의 집 헛간에서 빈대에 물려가며 잠을 설치면서도 구국의 일념으로 백의종군 길에 오른 이순신 장군은 날이 새자 길을 재촉하여 6월 2일 늦은 아침에 단계천(현재 산청 단계마을) 가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후 삼가를 거쳐 권율 장군의 진영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46일 간 머물다가 칠천량 해전의 참패 소식을 듣고 나서 권율 장군의 말에 따라 남해의 전세를 살피기 위해 7월 18일 삼가현을 거쳐 7월 19일에 단계천변을 지나 지금의 신안면 백마산성에 올라가서 지세를 살피고 단성현에서 하룻밤 유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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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3

남사예담촌 이야기

남사예담촌은 니구산(공자의 고향인 곡부의 산 이름에서 따온 산 이름이다.)이 마을을 둘러싸고 사수가 마을을 감싸고 돌아나간다. 산과 물길이 만들어 놓은 마을은 반달모양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마을 한가운데를 빈터로 남겨두고 있는데, 마을의 운세가 보름달이 되어 다시 기울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고려시대에는 왕비를 배출했고, 고려 말 문인 강회백과 조선 세종 당시 영의정을 지낸 하연 등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100가구가 넘게 사는 이 마을은 목조한옥과 전통한옥 등에서 사람이 실제로 살고 있는 게 특징이다. 한옥 마당 한 켠에 손수 가꾼 화단과 정갈하게 관리된 대청마루에서 집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덕분에 여행객들은 처음 만나는 한옥에서도 친근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이씨 고가(문화재자료 제118호), 최씨 고가(문화재자료 제117호), 사양정사(연일 정씨 문중의 재실. 문화재자료 제453호) 이사재(송월당 박호원의 재실. 문화재자료 제328호), 이동서당(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의 기반을 구축하는 업적을 이룬 면우 곽종석 선생을 기리기 위한 서당. 문화재자료 제196호), 사효재 등은 이 마을에서도 유명하다. 이런 한옥들이 만들어 내는 돌담길의 옛 담장 자체도 등록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됐다.

국악과 독립운동의 명소이기도 하다. 근대 대한민국 국악의 큰 스승인 기산 박헌봉 선생이 이 마을 출신이다. 선생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민족음악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악계에 온 몸을 던졌다. 1945년 국악국립원 창설을 주도 했으며 원장을 지냈다. 1960년 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술고)를 설립,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국악의 경전이라고 불리는 '창악대강'은 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안겨줬다.
유림독립기념관은 이 마을 출신인 면우 곽종석 선생을 포함한 구한말 유림들의 독립운동 역사를 기념하는 공간이다. 대한독립청원서 사건(1919년 3.1운동 직후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사건)이 중심이다. 대한독립청원서(파리장서)에 서명한 전국 유림 대표 137인의 주요 활동, 후대의 포상, 서훈 등을 전시하고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