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이야기

남명조식유적지

남명조식유적지

“천왕봉보다 높은 기상으로 우뚝 서다”
남명조식유적지 Sancheong Story

임진왜란 의병장들의 스승이었던 선비

조선 13대 임금 명종과 조선 14대 임금 선조의 끝없는 부름에도 초야를 떠나지 않았던 조선의 선비.
현실에 쓸 수 없는 학문은 버려야 한다며 퇴계 이황에게 일침을 놓았던 조선의 선비. 그 선비 남명 조식이 노년에 살았던 지리산 자락 산천재. 서늘한 바람 불어오는 산천재에 서서 지리산을 바라본다.

남명조식유적지에서 꼭 봐야할 것들
  • 산천재 : 조식이 61세 되던 해 지은 집. 산천재 마루 위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산천재 옆 장판각에는 선생의 문집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 묘소 : 산천재 뒷산 언덕에 자리 잡았다.
  • 덕천서원 : 조식이 세상을 떠나고 4년 뒤에 제자들이 지은 서원
  • 세심정 : 성인이 마음을 씻는다는 뜻으로 제자들이 지은 정자. 덕천서원 앞 강가에 있다.
  • 남명기념관 : 남명 조식과 관련된 유물을 모아 한눈에 볼 수 있다.
남명조식유적지2
# Story 1

제 한 몸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 못 하겠습니다.

1555년 11월 19일 조식은 고향인 삼가현에서 임금 명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같은 해 10월 11일 임금이 단성현감 자리에 조식을 임명했는데 한 달 가까이 고민한 끝에 사퇴 의사를 밝힌 것이다. 조식은 상소문에 이렇게 적었다. “지금 신의 나이가 60에 가까운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고 크게 일할 수 있는 온전한 인재는 아닌데 … 그 사람 됨됨을 알지 못하고 기용하였다가 뒷날에 국가의 수치가 된다면 그 죄가 어찌 미천한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 신은 차라리 제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조식이 단성현감을 사퇴하려는 첫 번째 이유였다. 그는 이어 두 번 째 이유까지 상소문에 적었다. “…위로는 위태로움을 만에 하나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털끝만큼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니 전하의 신하가 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변변찮은 명성을 팔아 전하의 관작을 사고 녹을 먹으면서 맡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 55세였다.

지난 세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학자와 정치인들의 파벌싸움에 신물이 났던 그는 젊은 날 과거시험에 나섰던 10년 세월을 제외하고는 어떤 관직이나 정계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굽힌 날이 없었다.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앉으면서(중종반정ㆍ1506년) 1400년대 말부터 지방에서 성장하던 사림파 인재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됐다. 기존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와의 일전은 불 보듯 뻔 한 일이었다. 1519년 두 세력의 대립이 절정에 달했고 그 결과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는 숙청을 당했다. 이 일이 바로 기묘사화다.

대립은 끝나지 않았다. 두 파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가는 상황에서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기묘사화 때 실권한 사림파들이 다시 정계에 나오게 된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제2차 싸움은 이렇게 예고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양상은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와 문정왕후의 대립이었다. 장경왕후에게는 원자 ‘호’가 있었으며, 문정왕후에게는 경원대군 ‘환’이 있었다. 다음 대의 왕을 누구로 세우는가에 따라 각 파의 정권장악 여부가 달라질 기로에 서있었던 것이다. 사림파의 득세도 인종이 승하하자 막을 내렸다. 문정왕후의 경원대군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명종이 즉위하던 1545년 수 많은 사림파들이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옥사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왕실 외척의 싸움이자 사림파와 훈구파의 제2차 싸움에서도 사림파는 일격을 당했다.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였다. 기묘사화 때 조식의 나이 열아홉, 을사사화 때 그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약관 20세부터 불혹의 나이가 지난 45세까지 칼바람 부는 그 정국을 바라보는 기개 높은 선비 마음은 편할 날 없었다. 38세에 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55세에 단성현감으로 임명되었으나 그마저 사퇴를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 Story 2

명종에게 올린 상소문 '단성소'

임금이 내린 단성 현감 자리를 맡지 못하겠다는 상소에 조식은 임금과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를 향해 쓴 소리를 주저하지 않고 던진다.
‘자전(慈殿. 문정왕후를 일컫는 말)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명종)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先王. 인종)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千百)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億萬)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파벌과 당쟁으로 정국은 혼란에 빠져 있고 말단 신료들은 술과 색을 즐기고 고관대작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한데 정작 백성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 나라 꼴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성의 발로였다.

하지만 명종은 상소문을 보고 난 뒤 자신을 ‘한낱 외로운 후사’라고 말한 것과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에 노하였다. 또한 상소를 검토하던 부서의 신하들에게 이런 내용의 상소가 있으면 조식을 벌해야 한다고 먼저 주청을 해야 마땅한데 그런 신하가 없었다는 것도 한탄했다.

그리고 10여 년 세월이 흘렀다. 삼가현에 살던 조식은 1561년 산청군 시천면에 산천재를 짓고 이사했다. 산천재는 지리산을 흠모했던 조식의 마지막 거처였다. 1566년 명종은 조식이 병환으로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약재를 내렸다. 명종은 약재를 내리면서 “내가 민첩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진 이를 좋아하는 성의가 모자라서 이와 같이 되었으니, 또한 부끄럽다. 상당한 약제를 내려 보내니, 모름지기 노병에 구애받지 말고 편리에 따라 잘 조리해서 올라오는 것이 옳다.”라는 글도 함께 전했다. 10여 년 전 자신에게 충언했던 조식의 뜻을 훗날이 돼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임금이 내린 약을 먹고 조식은 임금이 있는 한양으로 올라갔다. 1566년,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을 넘기고 마주 않은 임금과 늙은 신하의 대화는 짧지만 명료했다.

임금이 조식에게 물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듣고 싶다.”
조식은 대답했다. “군신(君臣) 간에는 상하의 정(情)이 틈이 없어야 참된 마음으로 서로가 미덥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마음을 열고 말을 받아들임에 있어 먹은 마음을 없이하여 중문을 활짝 열어젖히듯 하신다면, 군하(群下)들도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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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3

방울 소리로 나를 일깨우고 품에 품은 칼로 나를 겨누네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에 도전한 지 10년, 그러나 과거에 연연하던 그가 아니었다. 어느 날 조식은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세상에 나가면 공을 세우고 들어앉으면 절조를 지킨다.’는 대목에 이르러, 장부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하고 크게 마음을 가다듬고서 과거 공부를 폐기했다. 그 이후 그는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조식의 생각은 ‘배우면 곧 행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그와 동갑이었던 퇴계 이황은 경상도 지방을 대표하는 학자였고 그보다 27세 어린 기대승은 전라도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이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문학과 철학 등을 논했는데 이를 두고 조식은 이황에게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허한 논쟁은 필요치 않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황은 조식을 두고 ‘세상 밖에 정정(亭亭. 우뚝 선 모습)하고 노을 밖에 교교(皎皎.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다)하다.’고 평했다.

가난한 것을 편안히 여기고 스스로 도(道)를 즐겼다. 항상 가슴에 칼을 품고 다녔는데 이 칼끝은 스스로를 겨누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에 대해 가장 엄격했다. 또 허리춤에는 방울을 달고 다녔다. 집안을 거닐 때도 지리산에 오를 때도 그 종은 함께 했다. 종소리는 걸을 때마다 울려 그 스스로를 일깨우는 소리가 되었다.
조식은 <참동계(參同契. 당의 희천-希遷. 700∼790-이 지은 불교서적>가 뜻하는 ‘삼라만상의 참(參)과 평등실상의 동(同), 그리고 이 둘의 계조융화(契調融和)’를 새기고 다녔다. 양반과 상놈, 노비가 엄연히 존재하는 철옹성 같은 봉건 계급 사회에서 '만물이 평등하다‘는 불가의 진리를 받아들일 줄 알았던 유학자였다. 또 그는 일찍이 ‘경의(敬義)’라는 두 글자를 벽에 써 두고 배우는 자들에게 보여주었는데, 임종 시에 후학들에게 말하기를, “이 두 글자는 일월처럼 폐할 수 없다.”라고 했다. 1572년 1월1일 그는 그가 살던 지리산 자락 아래 산천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스승을 기리다

조식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남명학파라 불렸으며 곽재우, 정인홍, 조종도 등이 있었다. ‘경(敬)으로 마음을 닦고 의(義)로써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따른 이 제자들은 남명 조식의 사후 임진왜란이 닥쳤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의병장들로 활약했다.
제자들은 서원을 지어 남명 조식을 기리는 것에도 애썼다. 조식이 죽은 지 4년 뒤인 1576년에 지금의 덕산중고등학교 부근에 덕천서원을 건립했고, 그가 어릴 때 살던 삼가현에 회현서원(뒤에 용암서원이 됨)을 지었다. 또 1578년에는 김해에 신산서원을 세웠다. 광해군대에 이르러 대북(大北) 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이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세 서원들은 모두 사액되었고 조식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살아서는 초야의 선비로 살다가 죽어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자리에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