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탐방

퇴옹 성철

산청지역의 인물

퇴옹 성철

퇴옹 성철 큰 스님은 출가한 곳 해인사 백련암에서

1993년 10월 4일 7시30분 열반에 들었다. 그는 어지럽던 한국불교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가야산 호랑이었고 우리 한국 불교의 얼굴이었다.

타종교인들도 너그럽게 받아들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부처님 오신날 방한을 스스럼없이 환대하였던 한국의 거인 그의 속관은 합천이씨로서 임천처사죽각광우의 11세손으로 1912년 2월 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부율은공 이상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가소생으로 일찍이 단성초등학교를 거쳐 진주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20세때 전주이씨와 혼인하여 맏딸을 두고 젊은시절 사상적으로 방황하던 그는 불경에 이끌려 지리산록에 위치한 대원사에 참배하려 입사했다. 처자까지 거느린 그가 속인은 들어갈수 없는 탑전에 자리를 깔고 참수행에 들어간 것이다.

절집의 '룰'을 깨뜨린 셈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얼마간 실랑이가 벌어졌으나 굳은 집념은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해인사 백련암에 머물던 동산스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급히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왔다.

여러 스님들이 그를 살펴보았고, 동산스님이 그에게 "중이되어라" 고 권했다. 동산스님은 그를 성철이란 법명을 주면서 머리를 깎였다. 그는 후일담을 "우습게 중이 됐어" 라고 했다. 그 때 나이 24살(1935년)이었다. 집에서는 맏아들의 출가에 대해 펄쩍 뛰었다. 그러나 그의 집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중이 안되면 내가 죽을 팔자라" 고 어머니와 아내에게 위협을 했다.

그후 금강산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모친이 자주 찾았다. 그러나 그는 속세와의 단절을 위해 산위에 올라가 어머니를 접근 못하게 "후레자식" 처럼 돌을 던졌다고 한다. 모친은 한수 더 떴다. "너 보러 안왔다. 금강산 구경하러 왔지" 라고 했다 한다.

큰 스님 그는 1984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출가한 것은 이기심 때문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퇴옹의 답변은 "출가란 조그마한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인 국가와 사회를 위해 사는게야!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일체를 위해서 사는데 있는 이것이 불교의 참 사상이야" 라고 했다 한다.